
더위의 뉴노멀(New Normal, 새로운 표준) 시대
요즘 날씨를 보면 매년 봄이 사라지고 있다는게 온몸으로 느껴진다.
사실 작년 이맘때도
봄인지 초겨울인지 모를 요란한 날씨가 이어지다 갑자기 더워졌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올해 5월 말은 한술 더 뜬다.
작년에도 더웠다고 생각했는데,
올해는 그 더위의 강도와 기온의 수치 자체가 한 계단 더 높게 껑충 뛰어오른 느낌이다.
봄 특유의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은 간데없고,
선을 훌쩍 넘겨버린 한여름의 훅한 더위가 벌써부터 찾아왔다.
사계절이 뚜렷했던 어린 시절의 그 정답던 봄이 이제는 매년 더 멀어지고,
기온은 해마다 더 무섭게 치솟고 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하면,
거의 4개월 반 동안은 이 더위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시기가 이어질 터다.
생각만 해도 벌써 걱정이 앞선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뉴스에서 씁쓸한 기사를 하나 봤다.
지구의 평균 기온 자체가 야금야금 계속 오르다 보니,
이제는 "올여름 역대급 폭염 예상"이라는 표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내용이었다.
일시적인 더위가 아니라 기온의 기준선 자체가 통째로 위로 이동해 버렸기 때문에,
바야흐로 ‘더위의 뉴노멀(New Normal)’ 시대가 도래했다는 거다.
문득 기후 변화가 피부로 와닿아 무섭기까지 했다.

이러다간 이 기후에 어디 여행을 다녀도 땡볕 아래 걷는 것 자체가
고역이 될 것 같았다.
여행의 즐거움은커녕 온통 짜증만 내다 끝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그런 생각의 꼬리를 물다 문득, 내 고향 제주의 한 장소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바로 곽지해수욕장에 있는 <과물노천탕>이다.
지나치기 쉬운, 여름날의 비밀기지
그곳은 외지인들은 그냥 슬쩍 구경만 하고 지나치기 쉽지만,
고향 사람들에겐 여름날의 구원 투수 같은 비밀기지다.
해수욕장 초입에 덩그러니 있어서 그늘 한 점 없지만,
투박한 현무암 돌담으로 경계가 그어진 그 안쪽 세상은 완전히 딴판이다.
바다 바로 옆인데 짠내 없는 진짜 민물(용천수)이 땅속에서 퐁퐁 솟구친다.

재미있는 건, 지도를 켜고 이곳을 찾으면
온천이나 뜨끈한 대중목욕탕을 뜻하는
'빨간색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이콘'이 뜬다는 점이다.
지도가 지독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 그 물이 얼마나 차가운지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도 처음엔 발조차 디디기 힘들 정도로 시렵다.
뜨거운 온탕을 기대하고 들어갔다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지도 모른다.
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머리끝까지 지배하던 땡볕의 더위가 단 1초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지도의 따뜻해 보이는 아이콘과는 완벽하게 상반되는,
뼛속까지 얼려버리는 반전이 숨어있는 곳이다.
다가올 4개월 반의 기나긴 뉴노멀 더위를 떠올리니,
온몸이 기억하는 고향의 얼음장 같은 천연 냉탕(冷천)이 더없이 간절해진다.

바다 한가운데 솟아나는 한라산, 과물노천탕
과물노천탕은 제주 곽지해수욕장의 초입에 있다.
곽지해수욕장의 옛 이름이 <곽지과물해변>인데,
여기서 <과물>은 다름아닌 한라산에서부터 땅속으로 스며든 물이
바닷가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민물)’를 뜻한다고 한다.
예전엔 각 가정에 한라산 물이 내려오는 수도가 하나씩은 있었어서
여름에 그 물로 등물을 하면 너무 차가워서 한번 등물하면,
잠이 들때까지 그 차가움이 유지될 정도였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물이 해수욕장의 짠 바닷물에 섞이지 않고
그 장소에 지금까지 솟아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곳은 남탕과 여탕이 확실하게 구분되며
천장은 하늘을 향해 뻥 뚫여 있지만
밖에서는 안이 절대 보이지 않는 신기한 곳이다.
곽지해수욕장에서 놀고 난 후
바닷물을 씻어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물이 너무 차가워서 해수욕을 하고 나서 바로 몸을 담그기에는
다소 무리일 수도 있지만,
한라산 물을 온몸으로 느끼기에 훌륭한 장소임은 분명하다.
올여름은 지난해보다 더 덥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더워도 과물노천탕의 물은 발을 담그기 힘들 정도로 차갑다.
이 한라산 물의 서늘함으로 더위를 이겨내 보는 것은 어떨까.
다만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주차다.
몇 해 전까지는 인근 공터에 편하게 차를 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유료로 운영되고 있다.
그래도 1시간에 1,500원, 종일 15,000원이라 하니,
그나마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을 참고하자.

과물노천탕에 이은 또 하나의 노천탕, 셋다리물
이번에 소개한 과물노천탕 외에도,
삼양 해수욕장 입구 쪽에 가면 또 다른 매력을 가진 노천탕이 하나 더 있다.
내비게이션에 <셋다리물>을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곳은 지금도 주민들의 정겨운 빨래터로 쓰이는데,
물 온도가 과물노천탕처럼 얼음장같이 차갑지는 않지만
더위를 식히기엔 충분하다.
덕분에 외지인들은 잘 모르는,
현지인들만의 숨은 물놀이 명소이기도 하다.
제주의 노천탕은 그야말로 한라산에서 직접 내려오는 용천수로
제주의 원시적인 시원함을 품은 곳이다.
본격적으로 무더워질 날씨를 생각하니,
어릴 적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찾았던 노천탕이 사뭇 그리워진다.
이런 옛 기억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을 보니,
나이가 들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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